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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와 노출

기타 조회 수 11541 추천 수 28 2004.07.02 15:37:33
성경본문 : 마태복음 10:26-31 



은폐와 노출

마 10:26-31

두려워말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는 단락에 속
합니다. 그런데 16절 이하를 보면 제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
라고 예고되었으며, 오늘 본문에는 "두려워말라는" 문장이 세 번이나 반
복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그렇게 두려워말라고 신신당부를 하
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할 때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존의 세력에 영합하거나 일조 하는 일이라
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만,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
런 기존의 모든 체제를 전복하는 힘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는 새로운 것을 거부했으며,
헤롯을 중심으로 한 기정 정치도 역시 그랬습니다. 세례 요한같은 유대
의 위대한 예언자가 처형당한 사건들을 보면 그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
고 독단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말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당시의 상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의 교회 상황도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마태는 구전으로 내려온
이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상황에 접합한 것으로 판단해서 이렇게 보도하
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당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 우리가 세세하
게 확인해낼 수는 없습니다. 10장1절-25절의 말씀이 어느 정도의 정보
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16-18절의 말씀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이
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너희를 법
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
라.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 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
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보도만 보면 이 이
야기는 순교가 임박해있는 초기 기독교의 상황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
다. 이런 상황은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리떼, 법정, 매질, 총독, 왕, 재판.
이방인, 증언. 비록 그 시대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런 용
어는 바로 오늘 우리의 상황에도 그래도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를 초라하
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힘들이 오늘도 역시 동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
다.
물론 지금의 시대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거나 예수님을 믿는다
는 것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런 곤란한 입장에 떨어지게 하지는 않습니
다. 오히려 신앙생활이 적당한 교양으로 대우받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
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이런 위협에 직면해 있습
니다. 그 당시의 법정과 매질, 총독과 왕은 오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에게 매질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만듭니다. 법정과 총
독이 의미하는 바는 기존질서의 강화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바로 기존질서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황제를 신격화했으며, 그런 구도 속에서 로마제국의 단일성을 유
지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 황제의 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극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존의 힘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
에도 여전히 똑같은 구도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이 때로는 노
골적으로, 때로는 아주 음성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예민한 직관과 감수
성이 없는 사람들은 분간하지 힘듭니다.

자본의 힘
가장 대표적인 마성적 힘은 자본입니다. 흡사 초기 기독교 시대의 로
마 황제처럼 우리 앞에서 신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아파트 값
폭등을 잡아보려고 온갖 처방을 쏟아놓고 있습니다만 백약이 무효이듯
특히 서울의 강남 아파트 값은 계속 올라갑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
보다 더 빨리 돈버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
는 국민들이 있는 한 좋은 지역의 아파트의 상승세는 물가나 은행이자를
웃돌기 마련입니다. 티브이, 신문, 잡지는 한결같이 돈버는 기술을 전수
하는 데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지성인들은 입만 열었다하면 '황
금만능주의'를 개탄하지만 속으로는 철저하게 그런 자본에 예속 당한 채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말과 의식이, 말과 행동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나 같은 사람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딱 들어맞는 예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새만금'과 '부안' 사태를 보면
서 한쪽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의식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로 모순되는 결과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
다. 새만금 갯벌 간척 사업이나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은 현재 인간의 편
리한 삶만을 생각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중지되거나 대안을 찾아야 합니
다.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그래서 고유한 생태학적 세계이면서 돈
으로 환산될 수 없을 정도의 가치와 가능성을 가진 새만금 갯벌을 인공
적으로 육지로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핵폐기장 건설도 근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싼 핵에
너지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핵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또한 우리 후손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위험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마음놓고 전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
런데 그 지역 분들이 핵폐기장은 결사반대 하면서, 새만금 간척은 사생
결단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반생태학적인 사건인데도 불구하
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극에서 극을 달렸을까요? 갯벌이 사라지는 것보
다는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경제적 이득이 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
다. 반면에 핵폐기장 건설로 안게 될 생존의 위기감이 그것으로 인해 얻
어지는 경제적 이득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겠지요. 약간 웃기는 결과이
긴 한데, 어쨌거나 이런 전반적인 현상은 오늘 이 시대를 끌어가는 절대
적인 힘이 경제적 논리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기독교인들이 이런 기존의 체제와 세력이 갖고 있는 자기
절대화를 뚫어볼 수 있다면 당연히 이들과 맞서서 싸울 것이며, 이런 결
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당했던 것처럼 법정에 넘겨지고
매질당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인
들의 정체성입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힘과 맞서서 싸운다는 사실이 그
것입니다. 물론 투쟁하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히틀
러의 나치즘 앞에서 본훼퍼처럼 무력으로 싸울 수도 있고, 또는 불복종
으로, 또는 침묵으로, 또는 기도와 설교와 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자기를 절대화하는 그런 세력
과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실천하고 산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으로
어려운 삶입니다. 모두가 '가'라고 말하는 데 자기 혼자만 '나'라고 말해
야 하는 상황은 우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
을 무조건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데, 자기만이라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생
각하지 않는다는, 이 작은 사실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
들이 이상하게 봅니다. 이런 게 바로 성서에서 기록된 '매질' 같은 게 아
닐까요? 시대정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삶의 토대를 놓고 살아가기 때
문에 받아들여야만 할 소외 같은 게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만 박해일 것
입니다.

드러날 은폐의 세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
십니다(26). 신앙적인 사리판단이 명백한 사람이라면 정말 두려워할 만
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
다. 여기에 이것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비
밀이 알려진다고 말입니다.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곧 은폐가 노출되는 과정입니
다. 궁극적으로 종말이 되면 그 모든 것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점
에서 지난 주일의 설교인 "종말론적인 삶"에서 말했듯이 종말론은 곧 진
리론입니다. 기독교는 참된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
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절대화하는 이 세상을 악한 세력
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
나기 때문입니다. 경제, 정치적 패권의 허상이 곧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
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
독교인들은 그런 미래에 희망과 모든 확실성의 토대를 두고 살아가는 사
람들입니다.
은폐된 세계는 곧 영적인 세계입니다. 이 세상의 힘들은 겉으로 드러
난 세계만을 다룰 뿐이지 아직 은폐된 영적인 세계를 다룰 수는 없습니
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
이지 못하는 사람들"(28절)이라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힘은 우리의 육신을 죽일 뿐이지 영혼을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불편하게 만들뿐이지 우리의 정신을 건드리지는 못합니다. 사람
들의 평판을 나쁘게는 만들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는 못합니
다.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킬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
다. 비록 적은 연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지위가 변변치 못하
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결정으로 훼손되지 않습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연봉이 많다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힘으
로 자리잡고 있는 그런 두려운 세력들은 우리의 육신에만 자신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는 아무 무기력한 존재들입니
다. 왜냐하면 그 영적인 세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의 세계에 삶의 토대를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보이는 세계인
육신만 괴롭히는 세력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실제 삶에서 느끼는 이런 두려움은 참으로 막강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될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있
습니다. 젊은 어머니들 중에서도 아직 어린 자식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뒤떨어질까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
미 영어 과외를 가르치거나 아예 영어로 수업하는 유치원을 택하기도 합
니다.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가 피아노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거의
신경증에 걸릴 정도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이런 일반사람
들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기독교인
의 실존에 대한 깊고 예민한 통찰력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갈등
은 더 깊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독교인은 자기 혼자만 그럭저
럭 사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에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
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여전히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에 휩
싸여 있다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런 긴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
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이런 긴장을 느낄 만큼의 영
적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정신이 완전히 성령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긴장 없
이 절대적으로 영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개는 그런 긴장을 느낄 만큼의 의식조차 없이 그저 시대 정신에 충실
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외의 기독교인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과 현실적 두려움 사이에서 긴장하며 삽니다. 경우에 따라서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이 앞서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 차츰 두려움의 영역이 줄어드는 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삶이겠지요.
그러나 단지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두려움이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시간이 갈수록 이 두려움의 농도를 더 짙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받는 상처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
의 깊이가 더해갑니다. 반면에 아직 은폐된 것에 집중해야만 이런 두려
움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한 존재들
앞으로 드러나게 될 감추인 것은 위에서 말한 영적인 세계인데, 예수
님은 그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유적으로 설명되
듯이 푼돈으로 팔리는 참새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낱낱이 세어 둘 정도로 우리
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귀하다."(31절).
바로 이것이 감추인 것이고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 세실 정도로 우리를 귀하게 여기셨다고 말입니다. 고대 시대에 이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귀족만 귀한 사람들로 생각
했습니다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셨습
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귀한 사람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더 나
아가서 하늘나라는 바로 그 당시에 사람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직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땅의 질서에서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 보십시오. 오늘의 문명사회에 모든 인간이 그런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요? 배움이 짧은 사람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 동성애자들, 그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과 이라크 사람들이 미국에 의해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요즘 우리
는 너무나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인류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태입니다. 그 이유
는 다층다기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기에게만 집중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컨대 대통령의 자리는 그 사람
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서 있다는 가장 초보적인 원리
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 교수직도 역시 그 교
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으로 와 닿지 않는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모든
사람이 귀한 대접을 받는 그런 사회는 요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이 말씀은 과연 확실한 걸까요? 그게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비유의 말씀이니까요. 다만 예수님
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아직은 감추어진
세계이지만 모든 인간이 귀하게 대접받는 그런 세계가 우리에게 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 때가 종말이며,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겠지요. 이런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그런 세력을 두
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세계가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제자들의 사명
예수님은 이런 은폐의 세계를 알려주시고 이어서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
라."(27절). 이 문장은 무언가 비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어두운 데'와 '속삭이는 말'은 '감추인 것'과 '비밀'을 뜻합니다. 이 말씀
을 좀더 확대 해석하면 예수님은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이 비밀을 속삭이듯이 들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 비밀을 드러내놓고 말해야만 합니다.
은폐의 세계를 노출시키는 게 바로 제자들의 사명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체 주제와 연결해서 제자들의 사명을 설명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서 이 비밀
을 알아듣도록 해명하는 작업이 바로 제자들의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은폐의 영적인 세계를, 그리고 은폐된 하나
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확연히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할 수 있
을까요? 오직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제 각각으로 주
어집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이 어두운 데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의 귀
에 대고 속삭인 것을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제자
로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비밀, 그 숨기운 것을 알아들은 사
람은 이제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증거하고 증명하며 살
아야 할 것입니다. 학문이나 사업이나 직장생활을 통해서도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가 밝히 드러난다는 것을, 하나님의 우
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2003.10.5>



profile

[레벨:13]토토

May 20, 2007
*.158.162.30

은폐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험하기 위해 광야의 고독으로 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셨었지요
죽으면 만날 하나님을 지금부터 만날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삶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구요
이제는 광야의 고독속에서 제 남은 삶의 근거가 될 낯선 두려움을 만나고 싶습니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데, 고독해져야 하는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정으로 외로운건지 아직도 무언가에 기대고 있는건지
광야는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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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求道者

May 20, 2007
*.241.161.130

PSTM 님! 사랑채 1586번 글과 거기 댓글들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좀 도움이 되실지도~^^
특히 마지막에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차분하게 읽어 보세요.
profile

[레벨:13]토토

May 20, 2007
*.158.162.106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조회도 많은데 댓글은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조급해졌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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