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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기타 조회 수 14110 추천 수 119 2005.11.06 21:27:47
성경본문 : 마태복음 25:1-13 
http://wms.kehc.org/d/dabia/11월6일.MP3http://wms.kehc.org/d/dabia/11월6일.MP32005. 11.6.      
마 25:1-13
그 날과 그 시간

열 처녀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는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소위 ‘열 처녀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오늘의 이야기도 역시 기원 1세기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결혼 풍습의 한 장면입니다. 신랑은 밤중에 자기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에 와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때 신부도 자기 친구들과 동행합니다. 신랑 친구와 신부 친구들이 횃불을 들고 춤을 추며 신부 집에서 신랑 집으로 행진합니다. 양쪽 집안은, 특히 신부를 데리고 올 신랑 집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겁니다. 그 동네의 큰 축제였을 테니까 말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결혼이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동네 축제로 승화되는 이유는 결혼이 바로 동네를 지탱해주는 기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동네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면은 정상적인 결혼식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이 올 때를 대충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들 정도로 신랑이 늦게 왔다고 묘사합니다. 어떤 주석학자는 이 장면이 신랑 집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신부 집에 온 신랑은 신부 집 어른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의논하느라고 시간이 늦어져서 신부 친구들이 먼저 신랑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신부는 친구들이 아니라 나중에 신랑과 함께 왔겠지요.
어쨌든지 열 처녀들 중에서 다섯은 등잔과 기름을 준비했지만, 다른 다섯은 등잔은 준비했지만 기름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을 가리켜 미련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처녀들은 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을까요? 신랑 집에 기름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신랑이 그렇게 늦어질 거라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은 준비하지 못한 상황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미련한 처녀들이나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잠 앞에서는 아무리 슬기로운 처녀들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는가봅니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밋밋하게 흘러가다가 이제 가파르게 진행됩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쳤던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횃불을 밝히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9절). 이런 대답은 듣기에 따라서 너무 냉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잔치를 위해서는 정당하며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만약 미련한 처녀들의 요구대로 기름을 반씩 나누어 쓴다면 결국 결혼 잔치 자리를 밝혀야 할 불이 중간에 꺼지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나갔고, 그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다섯 처녀들은 이제 불을 밝히고 잔치를 시작했지만, 기름을 사러 나갔던 다섯 처녀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문이 잠겨버렸습니다. 왜 문이 잠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의 습관이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이 비유를 교훈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설정했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이런 상황 앞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한번은 친구들에게, 또 한 번은 신랑에게 간청을 한 셈입니다. 그러자 신랑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12절). 마태는 신랑이 미련한 처녀들을 외면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 비유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13절).

모르는 시간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비유를 읽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신랑인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오신다고 했던 그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예수님의 그 말을 우리가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우리의 믿음이 허황한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 처해 있던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는 매우 실감 있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자신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우선 일차적인 대답입니다.
신랑이 오는 때가 바로 “그 날과 그 시간”입니다. 성서와 기독교 신학은 이 날과 시간을 예수님의 재림, 심판, 종말 같은 묵시록적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과연 이 날과 시간은 언제이며, 그 사건은 무엇일까요?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서른세 살 동안 살았던 나사렛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다시 이 땅에 오시는 때가 바로 그것인가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따르면 구름 타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다시 오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렇게 구름에 싸여 다시 오신다는 말이며, 그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 날과 그 시간입니까?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거나 다시 그런 모습으로 내려온다는 설명은 그 당시 사람들의 세계 이해에서만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구름과 하늘은 비밀의 세계입니다. 그들이 손을 댈 수 없는 그런 비밀의 세계가 바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런 생명의 비밀이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진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완전히 알려지는 바로 그 순간이 그 날과 그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생명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 말이 조금 이상한가요? 이렇게 정열적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생명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이상한 말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먹고, 배설하고, 자고, 돈 벌고, 나름으로 자기를 성취하면서 살아가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를까요? 지금 우리의 삶, 이 역사는 그냥 이렇게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예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희가 앞으로 5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우리가 예측할 수 있을까요? 예희의 50년 후는 아직 우리에게 숨어있습니다. 50년 후의 예희를 우리가 모른다면, 결국 지금 우리가 아는 예희는 부분적인 예희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는 아직 먼 미래를 남겨놓고 있는 예희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명을 모른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죠.
그런데 우리의 삶은 늘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잘 잘 살아야 하고, 지금 어떤 업적을 남겨야 하고, 교회당도 지어야 하고, 세계선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100년 후의 역사만을 생각합니다. 100년 후에 우리 가문이 빛을 내야하고, 기독교가 크게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묶여 있습니다. 이렇게 100년 후의 역사를 내다보는 것도 어떤 점에서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일반 역사가들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그것마저 뛰어넘은 절대적인 생명이 완성될 그 때를 내다보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삶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개량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적인 혁명에 우리 신앙을 맡기지도 않습니다. 신랑이 올 그 날과 시간을 언급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생명의 근원이 역사 너머에서 개입하는 그 날과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때는 참된 해방과 자유가 현실이 됩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불만스럽지 않는 생명이 완성됩니다. 이게 곧 종말론적 삶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날과 시간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 세계는 그야말로 ‘장소가 없다’는 뜻의 ‘유토피아’라고 말입니다. 그런 유토피아를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생은 선택입니다. 완전한 생명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자기의 삶을 걸어두면 되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현실에 만족스럽게 살아가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신랑처럼 우리가 모르는 때에 오신다고, 즉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으라.
이런 날과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영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긴장이 곧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명의 처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 자리에 왔는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녀들은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 집에 모인 이유는 신랑이 왔을 때 횃불을 높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잔치를 베풀기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늦는다고 하더라도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그녀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면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들은 미련한 여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단순히 부지런하거나 게으른 것, 또는 지성적으로 뛰어나거나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그녀들이 신랑을 기다려야 할 사람이라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도 이런 미련한 처녀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많이 했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사태 앞에서 종말론적 인식을 잃어버리고 그저 현실 안주에 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영적인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도 시험을 코앞에 둔 경우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하지만, 평상시에는 마음이 풀어지는 것처럼 평소에 영적인 긴장감을 경험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우 무미건조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태양이 떴듯이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태양이 내일 뜨지 않을 가능성도 아주 높습니다.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하더라도 그게 바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근본과 직결되어 있다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영적인 긴장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또 하나의 극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그 날과 시간을 열광주의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결국 현실의 삶과 역사를 포기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이 양쪽의 극단을 배격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현실을 포기하는 열광주의자도 아니며, 절대적인 날과 시간에 관심이 없는 현실주의자도 아닙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곧 종말이 오니까 이 세상일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종말이 아예 없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에만 충실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사람은 열광주의와 현실주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본문말씀 그대로 “항상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일상에 이미 종말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꽃 한 송이, 개미 한 마리에도 역시 종말에 완성될 그 생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이 현실에 아직 그 종말의 생명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줄 압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이 세상의 생명에는 고난과 허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깨어있는 사람은 그 고난과 허무 안에서 절대적인 생명이 시작됐으며, 결국 완성될 것을 희망합니다. 그 고난과 허무의 일상 앞에서 그는 절망하지도 않고 그것을 절대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완성될 그 날과 그 시간을 참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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