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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체

기타 조회 수 13204 추천 수 54 2006.03.12 14:33:19
성경본문 : 로마서 4:13-25 
http://wms.kehc.org/d/dabia/06.03.12.MP32006. 3.12.        
믿음의 실체 (롬 4:13-25)

아브라함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믿음의 모범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25장에 서술되어 있는 아브라함은 고대 이스라엘의 네 명 족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네 명의 족장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믿음과 관계된 사건은 대략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원래의 고향인, 바벨론 문면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핵심적으로 이런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고대 족장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큰 타이틀을 붙여주었지만 그가 영웅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는 용모가 뛰어났던 아내 사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도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내어 쫓을 정도로 성격이 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온 그런 삶으로만 본다면 그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조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지금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시켜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질문과 이런 주제를 너무 종교적인 의미로만 새기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을 물려받는다는 말과,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직결됩니다.
세상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역사적으로 보장된다는 의미이고,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실체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 문제는 접어두고 생명 문제만 조금 더 생각해보세요.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생명이 유지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진화가 바로 생명의 요체라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서로 같은 자리에 놓고 논쟁을 벌어야 할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건 흡사 어떤 축구 선수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축구대회에 나가서 이기기 위해 시합한다는 것이 별개인 것처럼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율법의 한계
어쨌든지 성서 기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는 생명을 시작하신 분과의 연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결이 떨어지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연결이 떨어지는 것이 곧 죄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곧 생명의 근원자인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바로 의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하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들은 의로운 백성들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는 의로워지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겉으로만 본다면 십계명을 비롯해서 온갖 종교적 규칙과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상세하게 규정한 규칙을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고대의 많은 법전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컨대 안식일이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무조건 쉬게 하는 법보다 더 철저하게 인간을 해방시키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식일 법에 의하면 노예, 외국인 노동자, 심지어는 가축까지 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을 확보하기 위한 율법이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기준으로 지켜졌지만 그 결과는 별로 바람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인 15절을 보십시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법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을 파괴하게 됩니다. 이게 곧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실정법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는 종교법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법인데, 이것은 ‘법’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에 똑같이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에게도 헌법을 비롯해서 형사소송법, 가족법, 노동법 등등, 많은 법이 있습니다. 법은 그 사회가 요청하는 강제규정입니다. 그런 데 그게 과연 인간 개인과 사회를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까? 물론 저는 법 무용론자는 아닙니다. 다만 법은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한 사회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일 뿐이지 개인과 사회의 의를 창출해내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바울은 이제 의로움의 문제를 법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 13b절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또한 16a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2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을 구원할만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실제적인 행동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파렴치한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속으로 감춰진 것까지, 아니 겉으로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우리는 대개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선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선한 행위들은 어느 순간에 독한 냄새를 피울 수도 있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에 나오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고아원에서 살던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공휴일마다 고아원을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가는 지방의원들에게서 이 소녀는 위선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어린이들을 돕는다는 사실이 선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자선을 행하고 있는 그런 태도를 말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여기서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절대적인 생명 사건인 구원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만약 그의 행위만 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도대체 행위는 뭐고, 믿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옳은 이야기이지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믿음이 무엇인지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겠지요. 이런 말이 기본적으로는 옳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당간다는 욕망으로, 어떤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기대로,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되거나 자식이 잘된다는 욕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려고, 불안한 마음에 위로를 받으려고 믿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언가요? 믿음의 본질이, 그 실체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의 설명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하겠습니다.

창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창조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답이 너무 간단해서 실망하셨습니까? 이 답이 너무 간단하다고 단정하지 마시고, 미리 실망하지도 말아야합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에서 살림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런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다.” 예, 그렇게 믿으면 좋습니다. 그렇게 믿고 사십시오. 그러나 이런 믿음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사는가? 나는 생명의 근원에 나를 맡기고 사는가?” 오늘 우리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한 그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마음을 쏟고 삽니다. 이는 흡사 음악가들이 음악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 음악을 이용한 자신의 성취에만 마음을 두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생명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과연 생명 현상의 근원에 심취하고 있나요? 교회도 생명보다는 자기를 확장시키는 일에만 마음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율법입니다. 자기의 믿음이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삭 출생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생물학적으로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늙은이들이었습니다. 19절의 표현을 빌리자만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21,2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불임부부가 아기를 갖게 될 것에 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라거나, 사업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지만 밀고 나가는 게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후손들이 이어지리라는 걸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후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게 곧 의로움의 초석입니다. 자기 삶과 운명과 미래를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맡기는 것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
바울에 의하면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동일합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몸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서 이삭이 태어난 것처럼 실제로 죽어서 실제로 땅에 묻혔던 예수가 궁극적인 생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무의합니다. 당연히 죽었던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죽어서 천당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과학의 역사를 파괴하는 광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참된 생명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시각은 곧 하나님의 행위, 즉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시작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성하실 그 종말에 일어날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오늘 우리까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일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게 온 영혼을 집중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게 믿음의 실체입니다.

profile

[레벨:1]똑소리

March 14, 2006
*.204.68.109

목사님!
본 설교주제와 관련없는 질문을 한 가지 해야겠습니다.
평소에 궁금했는데, 도대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창세기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불러냈다고 진술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학적 차원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목사님께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추측하신대로
아브라함이 가족회의를 통해서 이주결정을 내린 행동 속에서
후대가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했다는 점을 인정한다해도

그렇다면 최초로 야훼를 인식한 사람 또는 집단은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은 그 장본인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지만
사실 아브라함으로 돌아가보면 그가 어떻게 야훼를 인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은 야훼를 인식하지 못한 것을
후대가 자신들의 신앙의 근거를 아브라함에게서 찾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진술했다면 창세기가 단군신화와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당화하지만
아브라함 자신에게 물어보면
"나는 하나님 만난적 없어, 날 팔아먹지 마!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곤란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라엑 백성들의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태가 궁금합니다.
아니 답답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4, 2006
*.249.178.11

똑소리 님,
그런 궁금증이 아주 또렷하게 일어난다면
그건 똑소린 님(이하 똑)이 성서와 신학의 호수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야훼 하나님을 보았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 이전의 삶만 아는 우리는 그것 너머에서 존재하는,
또는 행위하는, 혹은 다가오는 그 하나님을,
또는 생명의 영을, 혹은 존재 자체를, 혹은 궁극적 실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방식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단군과 비슷한지 모른다고 했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한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언자와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신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깊었다면
한민족의 역사가 곧 하나님의 계시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군요.
그래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이 되면
한민족의 역사도 그 실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체는 없습니다.
오늘 내가 오랜 만에 신학적인 문제제기를 받고 보니 조금 오버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브라함의 실체가 없는 말은 트집잡히기 안성맞춤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맥락을 무시하고 그 말만 떼어서 남에게 전달하면
무지하게 욕을 많이 먹을 겁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전승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담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세월의 두께와 함께 이렇게 발전한 거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그 야훼 하나님이 명료했던 건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야훼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창조물이라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해석을 통해서 자기를 인간들에게 알리십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 하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어떤 신학자도 그럴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인식했다고 하는 그 순간에
그 하나님은 그런 인식을 뛰어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늘 새롭게 자기를 알리신다는 말이지요.
새롭다는 말은 그가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은폐라는 건 단지 막연하다거나 숨바꼭질 한다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 우주 전체, 역사 전체로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체를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 확실성의 토대가 궁극적으로 확실한 분에 의존해 있을 뿐이지
인간 스스로의 인식론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명이 쓸데없이 복잡해지네요.
아브라함 설화에서 중요한 건 분명히 해석입니다.
해석은 고정된 게 아니에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여전히 역사와 함께 새롭게 해석되듯이
성서 사건들도 역시 그런 해석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바른 해석들이 층을 이루고 연합하고 발전하면서
새롭고 창조적인 신앙의 층들이 열립니다.
그것의 클라이막스가 곧 예수 사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이런 기독교의 해석을 반대하겠지요.
왜 예수가 그런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결정판인지를 설명하는 게 신학입니다.
그게 기독론이지요.
지금 그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 기독론은 2천 년 전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 종말, 재림으로 연결됩니다.
즉 2천 년 전 예수 사건은 아직 완료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 사건은 종말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면
동시에 종말까지의 전체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준거이기도합니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모르겠군요.
해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해석의 주체라는 게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든 않든 그게 곧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똑 님의 질문 두 가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마치죠.
최초로 야훼 하나님을 경험한 개인이나 집단은 누군가?
그런 질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나 개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계시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만나듯이 그렇게 주-객 관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누가 최초로 사랑을 만났을까요?
사랑이 깊어질 뿐이지 그것을 만나거나 소유할 수는 없어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가 궁금하다고 했지요?
그겁니다.
성서는 그걸 감추고 있습니다.
신약성도 그렇습니다.
예수 사건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가 중요합니다.
그게 무얼까요?
그것의 해명이 곧 신학입니다.
profile

[레벨:0]riveroad

March 17, 2006
*.116.148.209

제가 볼때, 사도 바울이 믿음(faith)을 논하는 것은 출애굽기이하의 구약성서와 충돌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해석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민족이 구약성서로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사도 바울이 논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주장이 유대인들에게 씨가 먹히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핵심계약조건으로 율법의 대표격인 "할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3:13-32에 따르면 하나님과 씨름까지 한 야곱(이스라엘)이 있었지요. 물론, 많은 부분들이 전승을 후대에 기록화한 것이고, 수많은 저자들이 그 기록화에 참여했겠지요. 아무튼, 이 문제는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직결되는 문제 같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문자적으로 성서를 읽기가 거의 불가능해지지 않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또 엄청난 압박감이 엄습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가 전하는 그 사건들의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를 감당해야 하니 말입니다. 물론, 성서에 기록돼지 않은, 또 현재에 진행돼고 있는 그 하나님의 세계를 또 감당해야 하니 말입니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래서 존재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들의 숙제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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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정세웅

March 28, 2006
*.142.231.51

목사님,
우리에겐 어떤 블랙박스가 있습니다.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블랙박스는 마지막 어느 때에 그 실체를/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블랙박스는 자신을 충분히 지금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이 모자라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블랙박스를 어렴풋이 알지만,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어떤 책에 의하면 그 블랙박스에 대한 동화같은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것은 그 블랙박스를 경험하고/해석하고/발견했던 조상들의 집약된 글들입니다. 지금 보면 그 글의 수준은 정말 유치하고, 어떤 부분은 읽어줄만한 글도 있지만, 무언가 뚱딴지 같은 글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글들속에서 '블랙박스'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그 블랙박스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설사 다 알려졌지만, 우리의 인식이 짧아서 다 담아내지 못한다해도 다를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그 블랙박스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그 블랙박스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럼,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왜 블랙박스는 중요한가요? 왜 엘로우박스나, 블루박스는 안되는 걸까요?
블랙박스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알 수 없다고 한다면(가능성조차도), 그것은 없는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블랙박스속에는 정말 무언가 들었을까요? 블랙박스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보게되지는 않을까요?

차라리 하나님이야기를 잠시 치워버리고 확실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제가 한 모임에서 받았던 서면질문입니다. 고민중에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28, 2006
*.249.178.18

블랙박스라...
멋있는 표현이네요.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건 아닌 것 같군요.
왜냐하면 블랙박스에는 과거의 기록이 실증적으로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거든요.
열림과 감춤이,
노출과 은폐가 변증법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세계이겠지요.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과 무슨 ..."
여기에 바로 불가지론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알 수 없다는 말은
그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지 오늘 좋은 단어 하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와 블랙박스.

profile

[레벨:1]정세웅

March 30, 2006
*.17.7.135

그 친구의 말뜻인즉,
하나님이야기 없이 예수님 믿을 수는 없냐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난리나겠죠. 거기에는 000가 없다. 그건 신앙이 아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의 그 말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될 이야기라고 느끼고 있지요.
신앙의 신비를 포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의 세계/실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야기가
이미 실제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지요.
요즘 읽는 책들이 유신론의 종말/대안을 이야기하는 책들이라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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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97
24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3719
246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077
245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3
244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131
243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564
24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04
241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240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179
239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645
238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2
23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219
236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7
235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381
234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592
233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0976
23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133
231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851
230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799
229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644
228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658
2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0983
226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325
22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781
224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762
22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661
22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678
221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220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187
219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105
218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754
217 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16] 2007-05-13 15414
216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792
215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183
21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46
213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63
21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884
211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62
210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598
20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60
208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1
20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485
206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28
205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35
204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5967
203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2969
20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771
20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365
200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45
199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720
198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2943
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4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3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71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43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13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13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693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4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21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25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509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03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81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11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101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89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36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73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7899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22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40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440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886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30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72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4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7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7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09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80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679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100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30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8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60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41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7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6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95
»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4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2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5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6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1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9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8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6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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